일상의 고통, 죽음의 문턱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여정 ‘역행기’ URL: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274704.html ------------------------------------------------------------------------ 연극 ‘역행기’ 콘셉트 홍보 사진. 국립극단 제공 8년 동안 방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은둔하다 끝내 삶의 끈을 놓으려는 ‘인안나’, 집 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방바닥을 통해 미지의 지하 세계로 들어선다. 잃어버리고 잊힌 것들이 모여 사는 거대한 집이자 모든 기억이 망각되는 신비로운 웅덩이 ‘키갈’이 존재하는 공간을 향해 하강을 거듭하며 그는 사라진 가족을 만나고, 아픈 과거와 직면 한다. 그들은 가족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모습이다. 몸에 뿌리가 자란 채 딸을 위한 날개를 만드는 할머니 ‘주머니’, 상한 한쪽 날개로 날아오르려는 어머 니 ‘에레쉬’, 망치를 든 채 네발로 서있는 언니 ‘핑크’, 돌과 한몸이 된 또 다른 언니 ‘돌덩이’까지…. 저마다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둔 상처를 소환하고, 서로 비난하 고 용서를 빌고, 결국 화해하고 인안나만은 다시 지상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해 분투한 다. 2024년 15년 만에 재개한 국립극단 창작 희곡 공모에서 대상을 받은 ‘역행기’가 약 2년간의 작품 개발 과정을 거쳐 다음달 3~13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공 연 시간이 200분에 이르지만 풍요와 사랑의 여신 인안나가 이복 언니 에레쉬키갈이 다 스리는 지하 세계를 방문하는 여정을 그린 고대 수메르 신화 ‘인안나의 명계 하강’ 을 모티프로 한 작품은 흥미진진하다. 인류가 문자로 기록한 최초의 여신 인안나는 명 계의 법칙에 따라 일곱 관문에서 모든 소유물을 박탈당하고 나체로 죽음을 맞지만, 신 들의 도움으로 부활해 지상으로 복귀한다. 연극 ‘역행기’ 콘셉트 홍보 사진. 국립극단 제공 ‘역행기’는 수메르 신화의 지하 세계 하강과 지상 복귀의 서사에 판타지적 상상력을 더해 한국 근현대사의 모진 세월을 살아낸 여성 3대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고단한 삶 을 묵묵히 견뎌온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를, 가족 생계를 책임지려 봉제공 장 미싱사가 됐지만 기계에 손이 잘린 어머니는 산업화 과정을,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 며 실적을 내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빚만 남기고 사라진 언니는 현시대를 투영한다. 또 다른 언니 돌덩이는 어려서 버려진 미아나 해외 입양을 상징하는 것처럼 읽힌다. 물류센터, 콜센터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절망하고 세상과 단절한 은둔생활로 가족에게 고통을 안기던 인안나는 결국 그들의 도움으로 지상으로 돌아와 “행복한 기억을 떠올 려봐. 그럼 살 수 있어”라고 말하며, 오늘을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 24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주희 작가는 “문자로 기록된 가장 오 래된 하늘과 땅의 여신 인안나가 저승의 힘까지 얻고 싶어서 지하 세계로 하강한 여정 은 굉장히 용감했고, 오늘날 여성들이 그 여신으로부터 힘을 얻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어 이 신화를 차용했다”고 밝혔다. 신재훈 연출은 “고통은 절망일 수도 있지만 김 주희 작가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힘으로 작용한다”며 “작품이 관객의 일상 속 고통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 ‘역행기’를 만든 신재훈 연출(왼쪽부터), 김주희 작가, 김희경 영상디자이너, 박동우 무대디자이너. 국립극단 제공 인안나가 살던 방이 지하로 하강을 거듭하며 단계별로 죽은 자를 만나는 걸 무대 장치 로 시각화하는 건 쉽지 않은 도전이다. 박동우 무대디자이너는 “인간이 살아가는 최 소한의 공간 단위인 방이 지하 세계로 계속해서 떨어지는 구조인데, 실제 무대를 밑으 로 계속 파고들어 갈 수도 없고, 또 다른 층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 에, 방은 유지하되 방 상공에 그려지는 것들이 계속 바뀌도록 영상을 활용하고 천장에 투사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밝혔다. 또 방을 포함한 3톤 정도의 무대가 들어 올려지 고 내려지며 지하 하강과 지상 복귀 효과를 극대화할 것이라고 한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